미스터 브룩스. (Mr.Brooks) - 보실 분들은 읽지 마십쇼. 스포일러 왕창.

2007. 9. 10. 17:50film



괜찮은 스릴러 영화에 굶주려있던 요즘. 그냥 어디선가 잘만든 스릴러라는 풍문만 듣고 아무 정보 없이 극장에 갔다. 뜻 밖의 수작. 최근 본 영화중 제일 괜찮았다. 오랜만에 본 탄탄하고 긴장감있고 묵직한 스릴러. 정말 기대 이상이었다.

일단 배우. 케빈 코스트너도 섬세한 연기를 잘 해냈다. 하지만 정말 놀랍고 좋았던 것은 윌리엄 허트였다. 나오는지도 몰랐다. 실질적으로는 브룩스의 또 다른 자아이겠지만, 친구같은 느낌으로 등장해 브룩스에게 살인을 종용한다. 그 존재만으로 영화에 '느낌'을 실어준다. (위 사진)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딱 떠오르는게



이 사람인데, 역시 무게감은 정말 달랐을 것 같다. 이 양반이 주로 악역전문인데 반해, 윌리엄 허트는 연기와 더불어, 지금까지 쌓아온 이미지가 다르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등장인물이 많지 않은데 다 탄탄하게 자기 역할을 해주고 있다. 드(!)미 무어는 뭐... 나오는 지도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포스터에 이름도 올라가 있더만. 나름 호화캐스팅이다.

화려한 카메라 움직임 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전통적이고 깔끔한 연출로, 카메라를 드러내기 보다는 주로 사람에 집중하면서 힘있는 장면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연출의 특별함에는 주로 이 '다른 자아'가 많이 기여하고 있다. 공간의 제약같은 것이 없으니 어디서나 맘대로 등장하는데 이 등장들이 꽨 긴장감있다. 그리고 영화 전반적으로 카메라는 브룩스의 내면을 조용히 보여주는 것에 많이 집중한다. 사람이 실제로 피를 흘리며 죽어나가는 장면은, 전체에서 세번정도 뿐이다. 나머지는 그냥 그런 일이 벌어졌음을 암시하는데, 그 분위기 만으로 이런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것이 놀랍다. 몸을 쓰는 액션씬은 드미 무어를 중심으로 해서 두번 등장하는데, 그리 크지 않은 장면들이다. 그런데 굉장히 리얼하게 연출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사운드를 잘 조절한 느낌이다.  

이런 온갖 칭찬들은 사실 내용을 좋게 봤기 때문에 나오는 걸꺼다. 먼저 브룩스와 다른 자아 사이에는 긴장감도 있고 우정도 있고 위로도 있다. 이 아저씨들이 뭔가를 공감하며 같이 웃고 하는 장면은 비현실적이면서도 참 독특하게 느껴진다. 이중인격, 혹은 자기안의 다른 어떤 존재와 싸우는 캐릭터들은 많은 영화들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되어왔다. (대표 : 골룸!) 그런데 이런식으로 확실히 본인의 다른 자아임을 보이면서, 친구처럼 묘사한 것은 처음인 것 같다. (뷰티풀 마인드의 경우는 친구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이 반전으로 사용되었으므로 다르겠지) 사실 유치해 보일 수 있는 위험이 큰데, 오히려 중후하고 탁월한 심리묘사로 느껴진다.  

역시 작품의 존재감은 근원적인 질문에서 생긴다. 브룩스는 자신의 살인충동을 제어하려 노력한다. 중독자 모임에도 나가고 (그냥 I'm addicted라고만 말한다), 기도하면서 자신의 충동을 잠재우려 애쓴다. 그렇게 참다참다 저지른다. 살인의 쾌감에 중독되어 있다는 차분한 묘사도 탁월하다. 피를 빨고 싶은 충동을 참는 흡혈귀의 얘기인 아벨 페라라 감독의 'Addiction' 하고도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을 듯 하다. 그런데 주된 무게는 이쪽이 아니다. 브룩스를 근본적으로 고뇌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자신의 딸이다. 딸이 누군가를 쾌감을 위해 죽인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것'을 딸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유전. 핏줄... 이것을 알게된 브룩스는 오열한다. 그리고 그 다른 자아는 딸이 언젠가 회사를 물려받기 위해, 언젠가 아버지인 자신을 죽일꺼라고 이야기한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가 무게를 가지게 되는 근원은 바로 이 부분에 있다. 비록 우리의 일상과는 멀게 느껴지지만, 사람들은 아직 근원적인 질문들에 반응한다. 존속살해. 생존본능... (오이디푸스를 생각해보자. 너무나 오래된 이야기 인데 아직도 그 문제에 관심을 끌고 있으며, 변주는 계속되고 있다.) 마지막 부분의 반전이 조금 맘에 안들기도 했지만, 최후의 장면은 이 문제에 대해서 또 한번 묵직한 느낌을 준다.

이런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작품적으로 충분히 긴장과 구성과 분위기와 무게를 가지면서도, 별로 돈을 쓸 구석이 없다.(물론 배우들 개런티는 제외 ㅡ.ㅡ) 영화는 결국 내용 싸움이라는 당연한 생각을 한번 더 하게 만들었다. executive producer중 한 명이 케빈 코스트너였다. 시나리오를 읽고 내용에 꽂히힌 거였을까?    

최근에 기대작이었던 조디악은 어땠는지 뭐 읽어보시면 알꺼고.
나한테는 이 작품이 세븐, 메멘토, 살인의 추억... 등과 비견되는 걸작스릴러가 되어버렸다.

(사족. 홍보의 '명품 스릴러'라는 카피는, 오히려 영화를 싸보이게 만드는 느낌이다. 베르사체같은거 입고 살인하면 명품스릴러가 되는건가? 카피가 그런 느낌을 준다.)